[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3장 정의의 道 - 2편

 

궁예는 단숨에 관청 앞까지 달려가 보졸을 시켜 현령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현령은 낮에 노파에게 삿대질당하고 욕을 먹은 것이 영 찝찝하고 불편하여 처소에 들어 술을 들이켜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명주성주의 징표를 가지고 있는 궁예의 청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동헌으로 들게 했다.

 

“나리, 흉포한 비적들이 백성을 침탈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를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군졸을 모아 적도를 토벌하고 억류된 백성들을 구제하여 주시지요.”

 

궁예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최대한 예를 갖춰 말했다.

 

“뭣이라? 이 소경 중놈이 명주성주의 낯을 봐서 침식을 대접해 주었더니 이제는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가뜩이나 노파의 일로 심사가 뒤집어진 데다 궁예까지 훈수를 두려 하니 현령의 화가 한 겹 더 치솟았다.

 

“이 중놈아, 물고를 내기 전에 썩 꺼져버려라! 다시 한번 내 눈에 띄었다가는 하나 남은 눈마저 성치 못할 줄 알아라!”

 

현령이 화증을 내며 격분하여 앞에 놓인 책상을 탕탕 내리쳤다. 궁예는 혐오감이 일시에 치밀어 올라 굳어진 얼굴로 방을 나왔다. 현령은 이내 아전을 불러 아무도 들이지 말라 이르며 애꿎은 아전에게 온갖 짜증을 내고 꾸짖었다.

 

“스님!”

 

그때 관아 안쪽에서 궁예를 기다렸다는 듯 불혹쯤 돼 보이는 수더분하고 착한 인상의 관원이 궁예를 불러 세웠다.

 

“스님, 스님의 뜻은 가상하오만 이곳 관청을 통해 그놈들을 잡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는 낮에 노파가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을 때 현령을 만류하며 달랬던 이였다. 그는 궁예와 현령의 대화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비적들을 토벌하는 것이 응당 관에서 해야 할 책무가 아닙니까?”

 

궁예가 따지듯 물었다.

 

“물론 이 일은 스님의 말씀대로 관의 소관이오. 하지만 이곳 관청에는 저 비적 놈들을 잡아들일 힘도, 의지도 없소이다.”

 

관원은 현령의 무지와 무능을 콕 집어 말하지 않고 은근히 돌려서 말했다.

 

“관에서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면 백성은 누가 구제하며 이곳은 대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궁예가 분기를 띠며 묻자 관원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현실을 냉정히 보아야 하오. 스님이 보시기에 이곳이 관청으로 보이오?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소. 작금의 신라 모든 관청은 힘없고 가련한 백성들을 겁박하며 고혈을 빨아먹고 기생하는 수질(거머리) 같은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오. 이런 물괴(物怪)에게 인간의 말이 통할 리가 있겠소? 안타깝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오. 저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의 마음가짐이 올바르게 변해야만 해결될 일이라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쉽게 되겠소?”

 

관원은 비분강개함과 처량함이 배어 있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궁예는 그나마 썩어빠진 관아에서 인간적인 온정을 지닌 관원 하나를 발견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더는 관가에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라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들은 포학과 악정으로 인민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것들은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지 못하도록 어깨를 짓누르고 눈을 멀게 했다. 백성들이 하늘을 보지 못하니 그곳에 깃든 희망과 밝은 미래를 품지 못한다. 희망을 품지 못하면 절망하는 법이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면 단념하고 포기하게 된다. 이제 관아, 아니 신라는 더는 기대할 것도, 백성이 의지할 수도 없는 절망의 땅이다. 이제 나 스스로 희망이 되어 나 자신만을 의지해야 한다.’

 

궁예는 홀로 행동하기로 결단했다.

 

“어디로 가야 그놈들을 볼 수 있습니까?”

 

궁예의 예기치 못한 대담한 물음에 관원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볼 수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비적들을 만나볼까 합니다.”

 

“아니, 비적들을 만나 무엇을 하시겠다는 거요?”

 

“그 어르신의 손녀를 돌려보내라고 달래볼까 합니다.”

 

관원은 궁예의 말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선량하고 순진한 스님을 보았나! 스님, 그 비적 놈들은 흉측하고 포악하여 사람 죽이기를 닭 잡듯 하는 자들이오. 오죽했으면 홍산 관아에서도 어쩌지 못해 쩔쩔매겠소? 그 할멈이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요.”

 

관원은 눈앞에 비적이라도 나타난 듯 손을 휘저어대며 만류했다.

 

“저에게 좋은 방도가 있어서 그럽니다. 놈들의 적굴 위치와 머릿수가 어찌 되는지만 알려주시지요.”

 

궁예가 다소 침착해진 어투로 다시 물었다. 관원은 그 당돌한 모습에 젊은 승려가 절방에서 눈 닫고 귀 막은 채 살아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모르고 제 죽을 자리를 찾아들려 하는구나 생각했다.

 

“스님이 생각한 바가 무엇이오?”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일각이 급한 일이니 걱정 마시고 알려주시지요.”

 

관원은 궁예의 끈질긴 채근에 질렸는지 아니면 궁예가 취하려는 행동이 궁금해서인지 본인도 헷갈려하며 비적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궁예는 비적들이 스무 명에 가까운 규모이며 홍산 초입에서 서쪽으로 십 리 떨어진 오솔길에 자주 출몰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비적 패거리는 홍산에 적굴을 튼 지 사 년 정도 되었는데 그 일대에서 횡포가 자심하여 그곳을 왕래하던 이들이 재물을 털리는 것은 둘째고 잘못 저항하는 몸짓이라도 보이면 목숨을 잃기가 부지기수였다.

 

이를 관아에서도 두고 볼 수 없어 토벌군을 조직하고 적정을 탐지하여 적굴을 들이쳤으나 오히려 비적들의 교활한 간계에 걸려 화살과 돌덩이 세례를 받았다.

 

결국 서른 명 가까운 사상자만 내고 애초에 없던 위신까지 깎인 채 패퇴했다. 갖은 위엄을 부리며 군사를 일으킨 현령은 되려 사졸들만 잃고 망신을 당해 그 후 관아에서 비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비적들은 이제 관아의 병졸까지 박살 내니 의기양양하여 당장에 서라벌까지 쳐들어갈 기세였다.

 

비적들은 차츰차츰 약탈의 영역을 넓혀 이 고을 저 고을을 무주공산인 듯 다니며 갖은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녔고 재물과 양식은 물론이요, 반반하기만 하면 부인네 처녀 할 것 없이 산으로 끌고 갔다.

 

특히 비적의 수괴는 살인귀라 불릴 정도로 포악했는데 조금만 수가 틀려도 칼을 휘두르니 그의 손에 목이 잘린 이만 해도 수십 명이 된다는 풍설이 돌았다.

 

비적의 실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궁예는 관원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홍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이미 날이 저물어 읍의 경계에 있는 주막에서 짐을 푼 궁예는 저녁을 먹고 방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녀를 구해낼 방도를 구상하며 헤아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비적은 스무 명 가까운 머릿수에 홍산 깊숙한 곳에 은거지를 두고 산 서쪽 오솔길 중도에 일부가 행객을 겨냥해 며칠 간격으로 오가며 때론 타관으로 옮겨가 약탈을 꾀한다. 요 앞전 노파의 집을 약탈했으니 한동안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없을 것이로되…… 적의 본거지를 직접 치고 싶어도 홍산 깊은 곳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이어진 길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수를 어찌 혼자 감당하랴. 포신구화(抱薪救火),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는 격이다. 그렇다면 묘수를 써야 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찰나 밖에 매어둔 절따말이 쥐새끼를 보았는지 히히힝 하며 발을 차고 콧바람을 냈다. 그 소리에 번득 궁예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짙은 회색 구름 무리가 하늘을 가려 날씨가 흐릿했고 멀찍이 보이는 산등성이는 피어오른 안개가 산허리를 감고 있어 스산한 기운을 발산했다.

 

궁예의 초조하고 비장한 심정을 보여주는 듯한 아침이었다.

 

궁예는 홍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의 모습이 얼마나 비장하던지 주막 여편네가 말 한마디 걸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배웅했다.

 

궁예는 미시(오후 1시~3시)경에 큰 바위 오솔길에 들어섰다.

 

이 산길은 옆 고을로 가는 지름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자취 하나 볼 수 없었으니 그만큼 비적의 잔혹함이 널리 알려져 오가는 인적을 완전히 끊어놓은 탓이었다.

 

아무리 빠른 길이라 한들 귀중한 생명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적들이 출몰한다는 큰 바위가 드디어 궁예의 단안(單眼)에 들어왔다.

 

장정 둘은 족히 올라탈 만큼 크고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궁예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고 등골로 후끈한 열기가 달아올랐다. 궁예는 말을 천천히 몰며 주위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소하게 부는 바람에 길가의 잡풀들이 나풀거렸고 새 울음소리와 작은 산짐승들이 풀숲을 헤치고 다니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흔들었다.

 

그는 주변의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큰 바위를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에 접어들 때까지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말의 속도까지 줄이며 걷다가 너무 멀리 왔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큰 바위가 희미하게 보일 만큼 한참을 지나쳐 내려온 후였다.

 

활시위처럼 팽팽했던 궁예의 긴장감이 스르르 풀어졌다.

 

비적들을 대면하지 못했다는 실망감보다 화를 면했다는 안도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궁예는 비적을 소탕하겠노라 출발한 순간부터 줄곧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파와 손주들이 불쌍하긴 하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왜 내가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비적들이 출몰하는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쩌면 궁예는 내심 비적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나라조차 지켜주지 않고 구할 생각도 없는 백성을 내가 대관절 어찌할 수 있겠는가…….’

 

궁예는 그대로 산길을 내려가 세달사로 향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말머리를 돌려 비적들을 찾아야 할지 고뇌에 빠진 채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했다.

 

‘어제 어르신과 했던 굳은 약속, 현령 앞에 섰던 용기, 비적들로부터 소녀를 구해내기 위해 세운 책략…… 이 모든 것이 한낱 젊은 혈기와 객기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단 말인가.’

 

궁예는 깊은 자책감에 휩싸였다.

 

눈썹이 찌푸려지며 눈가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순간 암흑을 찢는 벼락처럼 궁예의 머리를 꽝 때리며 보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현민, 선덕사, 명주…… 이제껏 내가 지나온 길은 보정 스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그 길을 통해 내가 얻고 배우고 익혀온 것이 무엇인가? 병법과 무예, 서책의 가르침과 힘, 그리고 세상을 향한 의지다.’

 

이제껏 궁금해 마지않았던 보정의 숨겨진 뜻을 마침내 알 것 같았다.

 

‘불쌍하고 힘없는 중생을 설법이 아닌 행위로 구제하라.’

 

순간 궁예의 전신을 관통하는 맹렬한 전율이 휘몰아쳤다. 털이 곤두서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떨려왔다. 절따말도 주인의 전율을 느꼈는지 머리를 떨며 앞발을 굴렀다.

 

‘가엾고 불쌍한 백성들을 내가 도우리라. 나라도 구하지 못하는 백성을 내가 구하리라. 백성을 위해 내가 일어서리라!’

 

그는 새로운 의지와 용기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아니, 의지와 용기를 만들어내는 법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생명을 거는 일이었다.

 

수수께끼 같았던 보정의 의중과 이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다시는 망설이지 않으리라! 다시는 겁먹지 않으리라! 다시는 이 길에서 주저하지 않으리라!”

 

궁예가 고개를 들어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산이 궁예의 뜻을 알아챈 듯 숲의 온 나무가 부르르 떨며 화답했다.

 


궁예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어제 묵었던 주막에 짐을 풀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때운 뒤 다시 큰 바위 숲길로 나아갔다. 숲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비적의 자취는 볼 수 없었다.

 

궁예는 또다시 주막으로 되돌아왔다.

 

주막 아낙은 단골 승려라며 저녁상에 특별히 돼지머리 고기를 얹어주었다.

 

궁예는 불제자는 육식을 하지 못한다며 점잖게 사양했고 아낙은 자신의 무식을 탓하며 민망해했다.

 

“홍산에 비적의 소굴이 있다던데 요즘은 도적질이 뜸한가 보지요?”

 

궁예가 슬며시 고기 접시를 상 밑으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뜸하기는요! 요즘도 발정 난 개새끼 마냥 여기저기 활개 치고 다닌답디다.”

 

아낙은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겸연쩍은 눈웃음을 쳤다.

 

“아이고, 제가 오늘 여러 가지로 스님께 결례를 범했네요. 돼지고기를 내오질 않나, 천박한 입담을 놀리지 않나.”

 

아낙은 부끄러운 듯 방글방글 웃으며 궁예의 눈치를 살폈다.

 

궁예는 아낙의 말에 개의치 않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서쪽 큰 바위 산길로 몇 번 다녔는데 통 볼 수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스님! 그럼 지난 이틀 동안 그곳을 왕래하셨단 말씀이오?”

 

아낙은 궁예의 물음에 나가려다 말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탁 치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이 스님, 아주 세상 물정 모르시는 분이구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다니시는 거요? 그 자리는 인간 사람 다니는 길이 아니고 저승으로 직행하는 길이오.”

 

“일부러 그 길로 든 것은 아니고 절에 급한 형편이 생겨 그리되었습니다.”

 

궁예는 아낙의 흥분한 기세를 누그러뜨리려 급히 말을 지어냈다.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어찌 그 길로 간단 말입니까! 그놈들은 사내고 여편네고 늙은이건 승려건 가리지 않고 해악을 끼치는 놈들이오. 다시는 그 길로 발걸음도 하지 마시오!”

 

아낙은 궁예를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인 양 애틋하게 대했다.

 

이때 밖에서 주인 사내가 스님 방에서 무슨 큰소리를 내냐며 닦달하자 아낙은 두 번 다시 저승길로 가지 말라 당부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낙의 극성스러운 다그침에 진땀을 뺀 궁예는 냉큼 저녁을 해치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궁예는 이른 아침을 먹고 주막을 나섰다.

 

주막 아낙은 궁예를 전송하며 하루를 빨리 가려다 백 년을 빨리 간다느니, 그 길에서 죽으면 극락왕생도 못 한다느니 하며 큰 바윗길로 가지 않겠다는 궁예의 다짐을 기어이 받아내고서야 배웅했다.

 

궁예는 아낙의 극성에 혼이 달아날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따스한 정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일찍 서두른 덕에 궁예는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큰 바위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비적들을 대면할 긴장감보다 오늘도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막 빠져들 때쯤 벌써 큰 바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전날과 다름없이 별다른 낌새는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대로 큰 바위를 지나치려 할 때 귓가에 날카로운 괴성이 들려왔다.

 

“요즘 중놈들은 말을 다 타고 다니는구나!”

 

궁예가 불량한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큰 바위 위에는 덩치 꽤나 있어 보이는 사내가 어느새 올라갔는지 허리에 양손을 얹고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 바위 뒤에서는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씰룩씰룩 엉큼하게 웃으며 여유만만하게 걸어 나왔다.

 

궁예는 속으로 ‘옳거니, 비적 놈들이구나’ 하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바위 위의 비적에게 큰절을 올렸다.

 

“살인귀 대장님께 소인 인사 올립니다.”

 

궁예의 절을 받은 바위 위의 비적이 무슨 별스러운 짓이냐는 듯 실눈을 뜨고 내려다보았다.

 

“무슨 잡소리냐, 이 중놈아!”

 

비적의 버럭대는 말에 궁예는 개의치 않고 일어나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저는 살인귀 대장님의 우레와 같은 명성을 듣고 오랫동안 흠모해왔습니다. 대장님의 수하에 들고자 중노릇을 때려치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궁예는 약간 숨이 차는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이 말은 제가 성의로 준비한 것이니 받아주옵소서.”

 

궁예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허, 요 중놈 보게. 이놈아, 나는 살인귀 대장님이 아니고 부대장이다! 그리고 네놈의 성의를 봐서 말짐승은 받아주겠지만 우리는 인간 짐승은 받지 않는다.”

 

부대장이라는 비적이 자신이 뱉은 말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대장님을 모시려고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런 성의를 봐서라도 잔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게 받아주십시오.”

 

두 손을 맞잡은 궁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간청했다.

 

“오, 그래? 그럼 이 길을 지나는 게 오늘이 처음이냐?”

 

“예, 풍문으로만 듣다가 금일 대장님을 뵈려 생전 처음 왔습니다.”

 

“우하하하!”

 

비적이 다시 몸을 뒤로 젖히며 통쾌한 듯 웃었다. 웃을 때마다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이 버릇인 듯했다.

 

“거짓부렁 마라, 이 땡중 놈아! 너는 이곳이 처음이 아니다. 너는 그제도 어제도 이곳을 지났다. 네놈이 우리의 행적을 탐지하러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다, 이 거짓말쟁이 중놈의 자식아!”

 

궁예는 일순 낯빛이 흐려지고 머릿속이 빙빙 어지러워졌다.

 

‘아차, 이놈들이 이곳에서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는 급히 정신을 수습하고 임기응변을 동원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예, 실은 이틀 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대장님께 인사드리려 했지만 아쉽게도 뵙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궁예가 이마빡에 식은땀을 흘리며 공손히 말했다.

 

“이놈이 끝까지 거짓이구나! 이놈아, 도대체 절간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돌부처가 거짓부렁이나 하라고 가르치더냐!”

 

“진정입니다, 대장님. 저는 태어나서 거짓을 한 번도 논해본 적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궁예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가며 간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비적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중놈 대가리를 짜개어놓고 말을 끌어와라.”

 

비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예의 뒤편에서 세 놈이 쑥 기어 나왔는데 각자 단도와 창, 쇠뭉치를 쥐고 있었다.

 

뒤쪽의 비적들을 확인한 궁예는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 공손했던 자세가 단숨에 풀어지더니 한쪽 다리로 짝다리를 짚었다.

 

간절한 빛을 띠었던 안색이 싹 바뀌며 그는 손바닥으로 푸르스름한 머리를 위아래로 쓱쓱 쓸어내렸다.

 

궁예가 난생처음 비적들을 대상으로 세운 계책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계략은 절따말을 선물이라 내주어 놈들의 마음을 얻은 뒤 본거지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를 봐서 그곳에 불을 놓아 적들을 혼란하게 만든 후 살인귀의 목을 베고 소녀를 구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책이 먹혀들지 않았으니 이제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궁예는 침착하게 말 엉덩이 위에 얹어진 얇고 긴 자루에서 박달나무로 만든 단궁과 화살 두 대를 꺼냈다. 단궁은 김순식이 말과 함께 선사한 명주의 명물이었다.

 

궁예는 민첩하게 바위 위를 향해 활을 재고 살을 먹였다.

 

부대장이라는 비적은 예기치 못한 궁예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바람을 가르며 삽시간에 날아온 화살이 그의 왼 가슴을 꿰뚫자 그 힘에 밀려 바위 뒤로 낙상해버렸다.

 

궁예는 살을 날린 직후 바로 몸을 틀어 나머지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창을 든 비적을 거꾸러뜨리자 나머지 놈들이 비명을 지르듯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

 

궁예 역시 비적들을 맞아 뛰어오르며 칼과 쇠뭉치를 피했고 도적이 쓰러지며 떨어뜨린 창을 날렵하게 집어 들었다.

 

궁예는 미친 듯이 쇠뭉치를 흔드는 비적을 마주해 허리를 앞으로 굽히며 복부에 창을 내질렀다.

 

비적이 컥 하며 입을 벌린 채 앞으로 엎어졌다.

 

단도를 들고 있던 다른 비적은 궁예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치며 움찔거렸다.

 

한편 바위 뒤에서 음흉하게 웃던 비적은 화살을 맞고 뻗어버린 부대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피다가 이쪽의 동료들마저 나가떨어진 것을 보자 약이 바짝 올라서 장검을 높이 치켜들며 고함을 지르고 달려들었다.

 

동시에 궁예의 눈이 냉정한 빛을 흘리며 창을 꺾어 잡고 힘껏 내던졌다.

 

나무 자루 끝에 달린 날카로운 쇠붙이가 비적의 가슴팍에 팍 꽂혔고 놈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져 즉사했다.

 

두려움에 오금이 저려 덜덜 떨며 칼만 붙잡고 있던 비적은 목숨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칼을 떨어뜨리고 수풀을 헤치며 산 위로 달아났다.

 

궁예가 천천히 절따말에 다가가 다시 화살 한 대를 꺼내 들고 어렴풋이 사라져가는 비적의 등판을 겨냥했다.

 

시위를 떠난 살이 쉭 소리를 내며 비적의 뒷덜미를 꿰뚫었다.

 

일이 시작된 지 일각(15분)도 채 되지 않아 상황이 완벽히 정리되었다.

 

그는 활을 든 팔을 툭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어 큰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난생처음, 그것도 다섯이나.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내가 저것들을 없애지 않았다면 내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죄 없는 선한 백성들이 저것들 때문에 애통해하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만 사람 형상을 띠었을 뿐이지 짐승보다 더한 패악질을 저지른 것들이다. 비적들은 악귀고 내가 할 일은 악귀를 쓸어버리는 것이다.’

 

일을 치러 흥분되고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궁예는 다음 일을 생각했다.

 

‘비적들은 모두 말 못 하는 송장이 되었으니 본진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허나 죽은 자들이 은거지로 복귀하지 않으면 분명 상황을 알아보려 사람을 보낼 터. 그때를 노리자.’

 

마음의 결정을 내린 궁예는 먼저 가까운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가장 큼지막한 집에 절따말을 맡기며 이틀 안에 돌아오겠다 이르고 보따리에 든 활과 화살만 챙겨 다시 큰 바위 산길을 찾았다.

 

시체들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궁예는 화살이 박힌 송장들에게서 살을 뽑아낸 뒤 시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은신하기 적당한 자리를 찾아 매복했다.

 

땅이 움푹 파인 곳에 나뭇잎을 모아 깔고 덮으니 오랜 시간 숨어 있어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싸늘한 기운이 그 뒤를 쫓듯 산 전체를 휘감았다.

 

사방이 암흑에 묻히자 산짐승들이 부산하게 나다니는 소리와 오우오우 하며 새끼를 찾는 듯한 여우 울음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그때 문득 두 개의 조그만 빛이 궁예의 눈에 포착되었다.

 

짧은 간격으로 빛을 야릇하게 흘리며 이쪽저쪽으로 떠다니던 광점은 어느덧 송장 가까이에 이르렀다.

 

궁예가 천천히 나뭇잎을 걷어내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어 활에 화살을 먹이고 사람을 홀리는 이상야릇한 두 개의 빛 정중앙을 매섭게 겨냥했다.

 

빛이 송장을 이리저리 더듬는 순간 시위가 당겨졌다.

 

야릇했던 빛이 산 주위가 떠나가라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흔들거리더니 이내 희미해졌다.

 

궁예는 비적에게서 노획한 칼을 빼 들고 화살이 박힌 곳으로 걸어갔다.

 

송장 옆으로 얼룩덜룩하고 희미한 형체가 드러났다.

 

표범이었다.

 

시체의 피비린내를 맡고 산을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궁예는 표범의 목덜미를 발로 밟고 겨우 화살을 뽑아냈다. 살촉이 대가리 정중앙의 두개골을 뚫고 깊숙이 박힌 탓에 화살을 빼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궁예는 실로 명궁이라 불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화살을 빼 들고 다시 은신하려던 찰나 저 멀리 위쪽에서 다시 두 개의 흐릿한 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범인가.’

 

궁예는 다시 살을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이번의 빛은 무언가 색달랐다. 움직임의 궤적이 전혀 일정하지 않았고 차츰차츰 그 윤곽과 밝기가 커지며 다가왔다.

 

‘산짐승이 아니다.’

 

그는 재빨리 활을 접고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저 멀리서 두런두런하는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비적들이었다.

 

“이런 제기랄, 이 컴컴한 밤에 이곳에 있을 리 있겠어!”

 

“그럼 어쩌나. 지엄하신 두령께서 가라는데.”

 

“분명 어디 마을로 내려가 한탕 신명 나게 벌이고 있을 게야.”

 

“또 모르지. 큰 바윗길에서 좋은 먹잇감을 만나 재미를 보고 있을지.”

 

“허, 이 사람 답답한 소리 말게. 이제 큰 바윗길의 소문이 파다해서 미치지 않은 이상 올 사람도 없을 것이야. 이제 저 길목도 폐해야 한다고.”

 

“또 어떻게 아나, 미친 년놈들이 있을지. 히히.”

 

이렇게 키득키득대는 소리와 함께 횃불의 불빛이 몇십 보 앞까지 들어왔다.

 

“아니, 이보게! 이것 좀 보게. 여기, 여기!”

 

비적이 송장을 확인한 듯 놀라움과 두려움에 떠는 말투로 소리쳤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숨이 다 끊기지 않았나!”

 

“이봐, 저쪽에도 있는 듯하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송장을 확인한 듯했다.

 

“이거 큰일이군. 여기 부두령까지 해서 다섯이 왔을 터인데 하나가 보이질 않는군.”

 

“없네, 넷뿐일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 죽은 범이 있는데 범한테 당한 게 아닐까?”

 

“범에게?”

 

“그렇지, 이곳에 누가 오겠나. 관아 놈들은 우리한테 당한 뒤로 오금이 붙어 이곳에 발끝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그렇긴 하네만 이건 그리 큰 범도 아닌데 이들이 이렇게 당할 수가 있겠는가?”

 

불빛이 밝지 못해 송장의 훼손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비적들은 그 죽음의 원인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궁예는 칼을 빼 들고 바위 뒤에서 그들의 행동을 계속 주시했다.

 

“아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두령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나?”

 

“암, 그래야지. 그럼 자네가 여길 지키고 있게. 내가 얼른 올라가서 두령께 알리겠네.”

 

“아니, 나 혼자 송장 곁에 있으라고? 예끼, 이 사람아! 내가 갈 테니 자네가 여기 있게.”

 

산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 비적들이 죽은 송장은 무서운지 한심한 입싸움을 계속했다.

 

“이 사람아, 우리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올라가세. 죽은 송장이 어디 갈 리도 없고 같이 올라가서 범에게 당했다고 알리세.”

 

둘은 뜻이 맞았는지 송장들을 다시 한번 둘러본 후 은거지로 발길을 돌렸다.

 

 

 

강이오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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