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오 연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천년왕국의 몰락' - 제2장 서남해의 호랑이 - 3편

 

박규는 사냥에 쓸 활과 창, 그물을 닦고 벼리고 다듬게 하여 날랜 군사 십여 명과 몰이꾼 열 명을 준비시켰다. 꼬리 없는 충직한 수렵견 동경이(댕댕이) 네 마리와 박규가 특히 아끼는 사냥매인 수지니(사람 손에서 기른 매)까지 대동했다.

 

수렵의 호쾌함과 문소군의 미인들과 향락을 즐길 생각에 기분이 충만해진 박규는 출발일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수하들을 매섭게 재촉하며 문소군을 향해 출발했다.

 

박규는 목운정도 데려갔는데 공마(貢馬) 중에 날랜 준총(駿驄)을 내주어 옆에서 따르게 했다. 태수는 이동 중에 마상에서 “빨리빨리 걸어라” 호령하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끝에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중간 기착지인 산중 주막에 도착했다.

 

박규 일행의 길라잡이가 먼저 주막에 도착해 박규의 거동을 알려서 주막 주인 남정네와 여편네가 사립문 앞 한참까지 나와 박규를 영접했다. 장졸과 몰이꾼들은 말과 동경이를 몰아 마구간에 묶어두고 짐을 풀었다.

 

주막은 방 네 개와 부엌, 광, 마구간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막 주인 내외의 안방은 박규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병졸들이 나누어 거했다. 몰이꾼들은 광에 이리저리 끼워 눕고 부엌은 주막 내외의 차지가 되었다.

 

박규는 방에 혼자 있기가 적적해서인지 주안상을 차려 내게 했는데 술은 수하를 시켜 챙겨온 백화주에 안주거리로는 주막에서 해낸 돼지 편육과 술국을 준비해 내왔다.

 

여편네가 정갈하게 차린 상을 박규 앞에 내려놓는 찰나 박규의 음산한 시선이 여인의 몸과 얼굴을 훑어보았다. 주막 여편네는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아 보였고 희고 둥근 복스러운 얼굴에 야릇한 눈빛, 몸매는 풍만하고 육감적이어서 산중 주막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여인이라 박규는 속으로 곱씹었다.

 

박규가 물러나려는 여인에게 혼자 먹기 심히 외로우니 잠시 앉아 있다 가라며 제법 엄숙한 어조로 일렀다. 여편네가 눈을 깜박거리며 탐스러운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 교태 섞인 망설이는 모양새를 보이니 박규의 기괴한 음욕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박규는 욕망이 앞서다 보니 조금 전의 위엄은 잊은 채 재차 옆에 앉으라며 경박하게 강권했다. 여편네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는데 눈을 찔끔찔끔하며 앉는 모양새가 얼마나 요염하고 뇌쇄적인지 박규는 살이 녹아드는 듯했다.

 

그는 술을 따르게 하고 여편네에게 권했으나 그녀는 병이 있어 술을 마시면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며 물리치고 박규에게 재차 술을 따라주었다.

 

박규가 그녀에게 “나이는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 남정네와는 어떻게 만났느냐? 달거리 주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며 온갖 시답지 않은 말로 수작을 다 걸었다.

 

여편네는 이런 박규의 수작이 싫지 않은 듯 눈웃음을 치며 술을 따랐다. 그녀의 태도에 자신감이 생긴 박규는 부엌에 있는 여편네의 서방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바짝 옆에 붙어 여편네의 몸이 마치 제 몸뚱이인 양 더듬고 주물러 댔다.

 

여편네는 지체 높은 태수께서 점잖지 못하게 지아비 있는 아녀자에게 교태를 부리느냐며 대담하게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녀의 남정네 홀리는 솜씨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였는데 박규가 몸을 주물러 대는 대신 그녀는 그의 넋을 쥐었다 놓았다 하였다.

 

여편네는 쉬지 않고 박규에게 술을 권하였고 그가 술잔을 들이켤 때마다 “천하제일 미남이다. 천하제일의 남정네다. 천하제일 영웅이다”라며 찬양했다.

 

잔을 드는 즐거움에 취해 박규는 백화주 한 되를 채 못 비우고 앉은자리에서 뻗어버렸다. 박규가 드르렁대며 누워버리자 여편네는 손바닥으로 그의 주둥아리를 탁 치고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여편네는 병졸들이 머문 방 앞에서 목운정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에게 태수께서 장졸들과 몰이꾼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주라 했다며 주막 뜰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모이라 일렀다.

 

이윽고 탁주를 동이째 내오고 푹 삶은 돼지머리와 돼지족, 간, 구운 염통 등을 내왔다.

 

장졸들은 이게 웬 횡재인가 하고 “태수가 많이 취했구나. 안 하던 짓을 하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인데”라며 그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표하는 한편 또 한편으론 그의 높은 이름을 칭송하고 만수무강을 빌며 신나게 먹고 마셔 대기 시작했다.

 

목운정은 속이 좋지 않다며 한 잔씩 돌아가며 술을 따라주고 도로 방에 들어갔다. 장졸들은 태수가 깰까 소리를 낮추며 “술이 달다”, “음식이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 “주막 부인네가 천상의 선녀로다” 등의 썰을 지껄였다.

 

주막 마당의 흥청거리던 분위기도 한식경이 조금 지난 후에야 파장이 났다.

 


타는 듯한 갈증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박규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런데 주위는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몸은 선 채로 결박되어 움직일 수 없었고 발은 맨발인 상태였던 터라 발바닥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디찬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박규는 꿈인 줄 알고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귀에 웅웅 하고 들리는 음산한 바람 소리와 결박되어 있는 촉감들이 너무 생생해서 점차 모골이 송연해지기 시작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박규가 소리를 쳤지만 돌아오는 건 기괴하게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박규는 지금 깊은 동굴 속에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동굴 저쪽에서 도깨비불 같은 불빛이 아른거렸다. 그 빛은 점차 박규 쪽으로 다가왔는데 불빛에 사람의 형상들이 비쳤다.

 

“게 누구냐? 어서 와서 나를 구하라!”

 

박규가 있는 힘껏 외쳤지만 불빛의 인적들은 대꾸 없이 천천히 다가섰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박규는 어렴풋이 불빛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이 떡 벌어지며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동굴의 어둠을 뚫고 걸어 나온 이는 이제 머리칼이 하얗게 센 정탁이었던 것이다.

 

태수는 머리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대신 심장이 쿵쾅거리며 몸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였다. 정탁은 초탈한 듯 무정한 표정으로 박규를 바라보았고 옆에 선 목운정 역시 멸시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정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저, 저…… 정탁이 아닌가.”

 

혀에 풍을 맞은 듯 마비된 억양이었다.

 

“그렇다. 처와 아들을 네놈 덕분에 저세상에 먼저 보내고 이빨을 갈며 오늘만을 기다리던 정탁이다.”

 

분노가 서린 목소리를 뱉어내는 정탁은 온몸이 화염으로 타오르는 듯했다.

 

“너는 나와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렇듯 만고에 다시없을 악행을 저질렀느냐!”

 

정탁의 눈이 붉어지며 한 발짝 다가섰다. 태수는 겁에 질려 뒷몸을 더욱 바위에 밀착시켰다.

 

“이…… 이보시게, 정탁이! 그건 오해일세. 내가 그런 것이 아니야. 그년이 나를 꿰어내서 그리된 것이네.”

 

“그 아가리 닥쳐라!”

 

목운정이 살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독사같이 사악한 놈,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또 거짓을 말하는구나! 여보게 정탁이, 귀만 더러워지니 저놈의 혀부터 뽑아버리세.”

 

운정의 외침에 박규의 아랫도리가 한 번 들썩하더니 뜨끈미지근한 것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운정이 헝겊에 싸인 것을 내밀자 정탁이 받아 들며 횃불을 박규가 묶여 있는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네놈이 음욕을 품고 패악을 일으켰으니 이제 더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정탁의 눈짓과 함께 목운정의 억센 손이 태수의 얼굴을 굳게 잡고 아래턱을 억지로 벌렸다.

 


정탁과 목운정은 작업을 마치고 함께 동굴 입구를 나섰다.

 

숲의 기운이 티 없이 맑고 신선하여 정탁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숯처럼 타버린 마음의 상흔이 다소나마 치유되는 듯했다.

 

정탁이 옅은 미소로 운정에게 눈길을 보내자 운정도 그에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탁이 가볍게 앞서 걸었다.

 

그들이 떠난 동굴에선 뭔가 웅웅대는 소리가 메아리쳤는데 혀를 뽑히고 두 눈을 잃은 박규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비명이었다.

 

그는 운이 좋으면 산중 짐승의 허기를 달래주는 자비를 베풀거나 아니면 고독하고 외로운 동굴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정탁의 준엄한 복수는 박규가 목운정에게 문소군 방문 지시를 내린 후부터 시작되었다.

 

정탁은 목운정이 문소군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박규에게 복수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 여겨 목운정과 함께 책략을 세웠다. 그리고 목운정이 빌려온 말을 타고 운정보다 먼저 문소군을 향해 출발했다.

 

정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최대한 얼굴을 가려 행동하며 문소군에 도착해 관청 근처에 거처를 정해두었다.

 

그리고 전에 문소군 군관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이 도진이라는 것과 그의 근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만큼 문소군에서 흔치 않은 참사였기 때문이었다.

 

정탁은 그의 거처를 찾아가 대면하여 동료들의 죽음과 그의 상흔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도진은 이 처참한 사단의 발단이 나령군 태수임을 알고 분개하며 정탁의 책모에 적극 협력하여 동료들의 넋을 달래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문소군에 도착해 태수의 접견을 마친 목운정을 만나고는 함께 도진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했다. 목운정은 임무를 마치고 나령군으로 돌아갔고 정탁은 도진의 집에 남아 일을 꾀했다.

 

도진은 문소군 태수의 애첩에게 접근해 태수의 관인을 빼낸 후 정탁이 적어준 서신에 관인을 찍어 나령군으로 향했다.

 

정탁이 준 서신에는 문소군 태수가 박규를 사냥에 초청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박규를 대면한 후 도진은 계획대로 목운정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그와 거사를 세밀히 점검하고 다음 날 문소군으로 돌아가 산중 주막 주인으로 행세할 주인 내외를 만들어냈다.

 

남정네는 자신의 동생으로 하고 여인네는 특출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까닭에 한참 고민했는데 겨우 생각해낸 것이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기방의 행수였다.

 

워낙 자주 찾던 기방이라 친분도 있었고 동료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던 데다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썩어 문드러질 악질은 삶아 죽여야 한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할 것을 결의했다.

 

그녀의 대담함과 의리는 천하영웅을 방불케 했다.

 

도진은 비극의 장소인 산중 주막을 다시 찾아 전과 같이 주막을 비우게 하고 술에 넣을 최면제와 연극의 주연들을 준비시켰다.

 

박규 일행은 예정대로 주막에 도착해 행장을 풀었고 정탁의 예측은 틀림없이 맞아떨어졌다. 기방 행수의 관능적인 몸매와 농염한 모습에 박규는 영락없이 그 가당찮은 음욕이 발동했다.

 

행수는 술을 권하며 준비한 약을 타 그를 잠재웠고 술동이에 약을 풀어 그 수하들에게도 먹게 해 함께 드러눕게 만들었다.

 

박규의 동행을 모두 처리한 뒤 몸을 숨기고 있던 정탁과 도진이 주막에 들어서서 인사불성이 된 박규를 끌어내 준비한 소달구지에 눕혔다.

 

산속 깊은 동굴로 옮기기 전에 주막 주인 행세를 톡톡히 해낸 기방 행수에게 박규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주며 사례했다.

 

이어 도진과 그의 동생에게는 박규의 신병을 자신과 운정이 도리에 맞게 처리하겠다 하고 큰일을 함께해준 것에 감사함을 표하며 작별했다.

 

주막에 기세 좋게 뻗어 있던 스무 명의 장졸과 몰이꾼들은 동경이(댕견)가 끊임없이 짖어대는 소리에 오시(午時)가 되어서야 간신히 움직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수는 이미 땅으로 꺼진 상태였고 주막 주인 내외를 찾았지만 있을 리 만무하여 다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멍청히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앞으로 어찌할 작정인가?”

 

목운정이 쓸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라벌로 갈까 하네.”

 

“서라벌?”

 

목운정이 예기치 못한 정탁의 대답에 당혹스러운 빛을 보였다.

 

“서라벌에 친분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는 이는 없으나 언제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은 인생이니 왕경을 한 번 경험하고 싶네.”

 

목운정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정탁은 목운정이 예비해둔 여분의 옷과 약간의 패물을 담은 행장을 걸어 메고 목운정과 눈물 어린 작별을 나누었다.

 

정탁은 서라벌로 떠났고 목운정은 상관인 박규의 행방불명에 실책이 있다 하여 관직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몇 달간 옥살이를 하다가 방면된 후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홀어머니와 함께 나령군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 살아갔다.

 

한편 서라벌에 도착한 정탁은 객관에 머물며 저잣거리와 번화가를 이리저리 헤매다가 진골 명문가인 김수연 집안에서 가병(家兵)을 모집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신이 특별히 거할 곳이 없는 데다 침식을 제공한다는 것에 마음이 끌린 정탁은 이름을 고치고 모집에 응해 서라벌에 정착했다.

 

점잖고 진중한 성품에 무예 또한 남다른 정탁이었기에 금세 두각을 드러냈고 마침내 김수연의 아비인 김원복(金元福)의 눈에 띄게 되었다.

 

김원복은 정탁을 자신의 호위로 삼고 대궐의 등청과 퇴청 시는 물론이요 잠깐의 출입에도 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김원복은 정탁이 맡겨진 일을 빈틈없이 훌륭하게 해내자 집안 내에서도 항상 근거리에 있게 했으며 집안의 대소사까지 맡기니 일개 가병이 아닌 집사의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또한 정탁은 상당한 지략도 갖추고 있었기에 김원복이 어떠한 일에 막혀 있거나 곤란한 경우가 있으면 적당한 조언으로 생각을 깨우니 갈수록 정탁에 대한 총애가 깊어졌다.

 

이러한 정탁이 가병으로 들어온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아 가병의 수장을 맡았고 김씨 가문 일가 외에는 아무도 지시를 내릴 수 없는 독보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정탁이 중년의 나이임에도 혼자인 것을 안타까워한 김원복이 얌전한 처녀를 구해주어 같이 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주기까지 했다.

 

김원복은 정탁의 능력을 알아주고 나중에는 친우처럼 대했으며 정탁 또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 무렵 김수연이 해적 소탕으로 출전하게 되니 김원복이 그토록 신뢰하는 정탁을 특별히 손을 써 별장으로 임명해 아들의 곁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모진 풍파를 겪고 이제 좀 살 만해진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친 셈이었다.

 


정탁의 과거사로 밤을 꼴딱 새운 견훤은 한층 더 정탁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런 정탁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일단 자신이 군량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함께하며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해보자고 제안했다.

 

정탁 또한 그의 말을 옳게 여겨 그와 동행을 결심했다.

 

견훤은 능애, 추허조, 관흔 그리고 열댓 명의 병졸과 함께 군량을 구하러 각 고을과 읍을 다녔으나 계속된 흉년과 수적의 약탈에 의한 상흔이 다 회복되지 못한 때라 모질게 백성을 다그칠 수 없어 곧바로 사냥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대흥산이라는 높고 골이 깊은 산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짐승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냥에는 견훤과 그의 벗들이 일가견이 있는지라 창을 지르면 멧돼지 머리통이요, 화살을 날리면 노루 뒤꽁무니였다.

 

그렇게 나흘 동안 힘을 들여 멧돼지 열일곱 마리, 사슴 스물다섯 마리, 노루 스물세 마리, 멧토끼 서른 마리, 산양 열여섯 마리와 가죽으로 쓸 만한 반달곰과 여우, 호랑이까지 잡아들였다.

 

이렇게 마련한 고기와 가죽은 촌락에서 곡식과 바꿔 군량으로 쓸 요량이었다.

 

사냥에 참여한 정탁은 견훤의 대담하고 능숙하며 힘을 들이지 않는 효율적인 사냥 방식에 크게 감탄했다.

 

사냥 솜씨와 함께 놀란 것은 병졸들과 함께하는 그 성품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엔 위압적인 외양에 사냥을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관흔을 심하게 구타하며 거친 모습을 보였지만 병졸들을 가까운 친구처럼 유쾌하고 스스럼없이 대하며 아끼는 모습이 정탁의 우울한 마음을 한껏 가볍게 했다.

 

견훤은 성공적인 사냥을 자축하는 의미로 멧돼지를 통으로 굽게 하고 인근 마을에 호랑이 가죽을 내주고 술을 얻게 하여 나흘 동안 산을 헤집고 다니며 고생한 장졸들의 노고를 풀게 했다.

 

또한 마을의 노인들이 찾아와 사냥을 나흘 만에 끝낸 것을 감사해하며 사냥을 며칠간 더했으면 짐승들이 한 마리도 남지 않아 산신께서 크게 노하였을 거라 지껄이고는 다음번에 곡식이 필요하면 어떻게든 구해주겠다며 굳게 약조했다.

 


“형님, 수적입니다. 수적!”

 

허우대가 큰 관흔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양새가 범에 쫓겨오는 미련한 곰처럼 보였다.

 

“수적이에요, 수적!”

 

아침 일찍 일어나 칼날을 손질하며 떠날 채비를 하던 견훤이 몸을 일으켜 물었다.

 

“수적이라니 이곳에 수적이 나타났단 말이냐?”

 

“아니, 이곳이 아니라 형님, 수연이 놈이 그놈이 달아났다 합니다.”

 

관흔이 급하게 뛰어오느라 숨쉬기가 가쁜 듯 엉거주춤하며 손을 무릎에 올리고 헉헉댔다.

 

“거, 무슨 알아듣지 못할 소리냐!”

 

견훤이 짜증 나는 표정으로 다그쳤다.

 

“영암에 수적이 나타나 김수연이 도망갔다는 말 같은데요.”

 

견훤 옆에서 각궁을 다듬고 있던 추허조가 관흔의 말을 친절하게 해석해주었다.

 

“형님, 허조의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수연이 놈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 합니다.”

 

관흔의 말에 추허조가 자신의 해석이 매섭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만족해하는 얼굴빛을 보였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퍽 소리와 함께 추허조가 앞으로 엎어졌다.

 

“뭐가 그리 좋으냐, 이놈아.”

 

견훤이 추허조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소식을 전하러 온 놈을 당장에 데려와라.”

 

관흔이 추허조가 엎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신속히 뛰쳐나갔다.

 


견훤이 영암군 병영을 나선 지 나흘째 되던 날 적선 네 척이 영암 해안에 유유히 나타나 하륙을 시도했다.

 

해안 초소의 경계병을 통해 수적의 침입을 전달받은 김수연은 당장에 병력을 소집해 해안으로 달려갔는데 적은 이미 배에 실었던 말까지 내려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수적의 머릿수는 150여 명 정도였다.

 

수적들은 예외 없이 까맣게 탄 얼굴에 상의를 풀어헤쳐 불량해 보였고 질서 없이 제멋대로 웃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러한 수적들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본 김수연은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허겁지겁 달려와 제대로 대열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옆에 있던 신범이 너무 급하게 출진하여 아직 전열도 갖추지 못하였으니 먼저 대열을 맞추고 장졸의 사기를 돋우어 적의 움직임을 보며 공격하자 권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김수연은 자신의 명을 거스른 신범에게 지엄한 군령을 들먹이며 수적을 멸한 후에 엄벌을 내릴 것이니 당장 군영으로 돌아가 기다리라 빽빽거리고는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대열도 이루지 못한 채 무작위로 적 앞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노루가 굶주린 이리 무리에 뛰어든 격이었다.

 

사실 영암군 부대는 사기가 처음부터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 이유인즉슨 그동안 군량이 모자라 끼니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것이 하나요, 또 김수연이 얼토당토않은 부대 운영과 장졸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태도로 대한 것이 둘이요, 마지막으로 신라 제일의 맹장이라 불리는 견훤이 그들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이 있는 힘껏 함성을 지르며 나아갈 때 적 앞에 제일 먼저 닿는 것은 기병이었다.

 

기병 이십여 기가 속도를 내며 수적 무리 앞으로 나아갈 때 수적들은 이미 기병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 누군가의 한마디 외침에 신속히 대열을 이루어 활에 살을 재우고 기병의 출격을 맞았다.

 

수적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보아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살수들 같았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기병들은 날아오는 수십 개의 화살에 대응하지 못해 순식간에 일고여덟의 기병이 낙마하며 대열이 무너졌고 말들은 혼비백산했다.

 

기병을 분쇄하고 승기를 잡은 수적들은 삼한 땅에서 볼 수 없는 칠흑같이 검고 무섭게 생긴 큰 말에 올라탄 장사의 알아듣지 못할 외침과 함께 창칼을 휘두르고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평소에 기병의 당당함을 지켜보며 우러러보던 신라 장졸들은 그와 같은 사태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 치고 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김수연은 장졸들이 질겁하며 도주하는 예기치 못한 모양을 지켜보며 자신의 엉망진창인 지휘를 반성하기보다 기병의 무능과 보졸들의 도주를 욕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적의 기병이 자신을 향하여 득달같이 달려옴을 확인하고는 피가 얼어붙고 손발이 떨려왔다.

 

그러나 화랑 출신에 어려서부터 무예를 나름 익힌 그였기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적을 맞았다.

 

김수연의 칼 쓰는 법이 제법 날카로웠던지 몇 번의 칼부림으로 적을 베었고 그에 자신감을 얻은 김수연은 한껏 고무되어 다시 칼을 세워 적을 맞아 나아갔다.

 

수적 둘이 말 위에서 떨어지니 그런 김수연의 나대는 모습이 눈에 띄는바 수적의 수괴가 미간을 찡그리며 김수연을 향해 질풍처럼 나아갔다.

 

김수연은 제법 볼 만하게 적을 맞았으나 칼이 몇 번 부딪치다 자기가 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의 말은 천마(天馬)로 불리는 명마라 단숨에 김수연을 따라잡았고 번쩍 큰칼로 내리쳐 그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약관(弱冠)도 되지 않은 청년 장수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성품이 편협하고 간악하며 아랫사람을 등한시하고 잔인하게 대해 오래 살면 분명 수만 가지의 폐악을 끝없이 저질러 세상을 어지럽힐 위인이었으니 빨리 죽은 것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었다.

 

이때 김수연의 명령으로 후위에 물러나 있던 신범이 아군의 패퇴를 보고 늦게나마 장졸들을 지휘해서 군영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겨우 수습해서 적을 방비했다.

 

승기를 잡고 신라군을 거꾸러뜨리며 매섭게 쫓던 수적들은 신라군이 군영에서 화살을 쏘아대며 방어하니 그리 군세가 많지 않았던 터라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김수연의 머리를 창끝에 꿰어 신라군 군영 앞에서 말을 타고 종횡하며 신라군을 희롱하다가 배가 정박해 있는 해안으로 물러갔다.

 

그날의 싸움으로 신라군의 지휘관과 칠십여 명의 군졸이 목숨을 잃었다. 총병력의 반에 가까운 손실이었다.

 


견훤은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그날 저녁 군영에 도착했다.

 

신범에게 그간의 일과 병력의 상황을 전해 들은 견훤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정탁을 위시한 군관들과 수적의 정황을 직접 확인하려 군영을 나섰다.

 

“저것들의 형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멀찍이 떨어진 언덕에서 적의 진영을 관찰하던 견훤이 정탁에게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 없이 어수선해 보이지만 내 눈에는 저것들의 일종의 기만술로 보이네. 우리를 꾀어 끌어들인 뒤 일거에 섬멸하려는 술책 말이야. 더구나 도적들의 사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 필시 저들의 수괴는 보통 놈이 아닐 게야.”

 

견훤은 정탁의 의견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함에 만족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새우좆 아가리 같은 것들 사기가 무슨 상관입니까! 당장에 쳐들어가 저놈들의 아가리를 딱 찢어놓읍시다.”

 

관흔의 무식한 의견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들 적의 진지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한편 신범은 추허조에게 다가가 왜 투구를 쓰지 않았냐고 조용히 묻자 추허조는 말없이 손으로 제 뒤통수의 상태를 확인시켜주며 견훤을 향해 매운 눈짓을 보냈다.

 

신범은 잘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안쓰러워하곤 추허조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관흔은 죄다 자신의 말에 무관심하자 이리저리 눈치만 보며 입을 삐죽댔다.

 

군영으로 돌아온 견훤은 군관 회의 석상에서 김수연이 전사하였으니 영암군 지휘관으로 정탁을 세우자고 추천하였으나 정탁 자신은 정규군으로 출진한 것이 아니니 맡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도리어 자격이나 능력으로 보아 군의 제일 격인 견훤을 추천했다.

 

이에 군관 모두의 동의하에 견훤을 영암군의 방수군 수장으로 추대했다.

 

이튿날 아침 견훤은 모든 군사들을 모아 수장으로서의 소감과 도적들의 씨를 말려버리자는 짧은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군영을 지킬 일부 군졸들만 남긴 채 군사들에게 밝힌 포부를 바로 실현하고자 군문을 나섰다.

 

수적들은 방수군의 움직임을 즉각 탐지하여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괴성을 질러대며 견훤을 맞이하러 나섰다.

 

수적들을 마주하고 진을 펼친 견훤은 말을 몰아 유유히 앞으로 나섰다.

 

수적들은 전날에 머리를 싸매고 꽁무니를 빼어 달아나던 신라군이 사뭇 달라진 모양새를 하고 나타난 것에 의아해하며 싸움 대형을 갖췄다.

 

수적들의 진에서 학처럼 목이 길고 키가 크며 잡티 하나 없는 칠흑의 검은 말을 탄 적의 수괴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고로 사람이란 자기 목숨의 위중한 때를 알아야 하는데 오늘이 바로 네놈들에게 닥친 위중한 날이다. 목숨이 아깝다면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에게 자비를 내려 새롭고 기름진 땅에서 살게 할 것인즉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라.”

 

이와 같은 적 수괴의 긴 사설은 그 옆에서 통변(通譯)이 듣고 해석하여 전달했다.

 

통변이 해석을 계속할 때 관흔이 은근한 태도로 견훤 곁에 섰다.

 

“형님, 제가 저 두꺼비 같은 놈의 목을 끊어 형님의 걱정을 덜어드릴 테니 대신 저 말을 갖게 해주시오.”

 

견훤은 두꺼비 같다는 그의 묘사에 얼굴을 돌려 자세히 관흔의 상판을 살피니 관흔의 얼굴 생김새가 꼭 두꺼비와 흡사해 보였다.

 

견훤은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아 속을 꾹꾹 눌러대며 겨우 참았다. 일전을 앞에 두고 군사들 앞에서 가벼운 모양새를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견훤은 안면을 굳히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관흔의 이야기가 있기 전부터 견훤 역시 수괴의 흑마가 시야에 들어와 있던 터였다.

 

견훤은 원래 식탐이나 재물에도 욕심이 없어 공을 세워 재물을 얻게 되면 주위 동료나 부하들에게 자주 베풀어주었는데 그런 그에게도 딱 하나 물욕을 일으키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명마였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생과 사를 거는 격렬한 전투에 자주 임하다 보니 힘이 좋고 형체가 튼튼한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삼한의 과하마(果下馬)나 토마(土馬)들은 지구력이 강하기는 하나 덩치가 작아 견훤이 올라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여서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전장에서 맹렬하게 적들에게 치달으니 보통의 말로서는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견훤이 타는 말들은 항상 피곤하고 살이 찔 겨를이 없어 삐쩍 말랐다. 군졸들은 견훤의 말을 안쓰러워하곤 했다.

 

“저렇게 빼어난 말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견훤이 정탁을 돌아보며 물었다. 요즘 무엇이든 정탁에게 묻는 버릇이 생긴 견훤이었다.

 

“내가 서라벌에 있으면서 많은 귀족들의 준마를 봐왔지만 저런 말은 처음이네. 내가 보기에 저 말은 서역 대완(大宛)이라는 나라에서 나오는 한혈마(투르쿠메니스탄-아할테케)라 짐작되네. 땀을 붉은 피처럼 흘리며 천리를 하루에 달린다는 천하 명마지.”

 

“아……”

 

견훤은 정탁의 뛰어난 식견과 한혈마의 정체에 경탄하며 짧고 굵은 탄성을 질렀다.

 

해적의 수괴는 견훤과 정탁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새를 보고 투항을 논의하는 줄 알고는 여유 있게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대화를 끝낸 견훤이 적호도(赤虎刀)를 옆으로 비켜 잡고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적호도는 견훤이 쓰는 초승달 모양의 자루 달린 큰칼로 호랑이 이빨과 같이 날카로웠다. 수많은 전투로 붉은 피가 수없이 묻은 탓에 여러 번 칼을 씻어도 핏자국이 닦이지 않아 주위에서 적호도라 불렀다.

 

견훤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돌입하자 수괴는 어이없는 낯빛을 보이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한혈마의 옆구리를 뚝 차며 누런 흙먼지를 피워 올리고 날아드는 견훤과 맞섰다.

 

대도와 적호도가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었고 서슬 퍼런 금속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양군의 군사들은 자신들의 책무조차 잊은 듯 감탄과 탄성을 내지르며 넋을 잃고 이 결투를 관전했다.

 

내리찍고 받아치고 밀어내고 베어대니 이 엄청난 접전에 말들마저 호응하여 서로 마주 보고 거칠게 호흡하고 견제했다.

 

두 군마는 마치 마주친 중심에 고정된 축을 둔 것처럼 주인을 태우고 빙글빙글 돌았다.

 

수괴는 천하 명마의 주인이 될 만한 절륜한 무예와 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견훤은 처음으로 호적수가 될 만한 자를 맞아 긴장했고 적 또한 예상치 못한 강한 상대를 마주하여 흥분과 초조함이 섞인 표정을 드러냈다.

 

이처럼 대등한 대결이 일각쯤 지나자 둘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견훤이 탄 말이 기운이 빠지는 듯 발을 질질 끌었는데 수괴는 역시 비범한 자라 상대 말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채고 견훤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견훤은 이 상태를 오래 끌다가는 난처해질 것을 깨달았다.

 

이에 적호도로 한 번 힘차게 내리찍어 적이 멈칫한 사이에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결전장을 벗어났다.

 

수괴는 방금 전 견훤이 내리친 칼질의 위력에 소름이 돋았는지 감히 견훤을 쫓지 못했고 오히려 이 상태로 싸움이 끝난 것에 안도했다. 자신도 싸움이 더 오래갔다간 저 괴물 같은 견훤을 당해낼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 사정을 알 리 없었던 군사들은 견훤의 퇴각을 패배로 인식해서 충만했던 사기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반면 수적들은 자신들 수장의 승리라 여기며 일제히 환호와 괴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영으로 돌아온 견훤이 자신이 패한 줄 알고 입을 딱 벌린 채 말 위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던 관흔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내동댕이치고는 그의 튼튼한 말로 갈아타고 다시 적을 향해 폭풍처럼 내달려간 것이었다.

 

수괴는 자신의 승리라 여기며 큰칼을 내두르며 한껏 뽐내고 있었는데 견훤이 전과 다름없이 질풍처럼 내달려오니 간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견훤이 생애 처음으로 온 힘을 짜내 찍어대고 베어대니 당당하던 수괴는 놀라고 힘이 다해 허둥대다가 한순간에 일어난 무지갯빛 줄기와 함께 목이 달아났다.

 

그렇게 목이 없는 몸이 말 위에서 비틀비틀대다가 푹 떨어지니 환호와 괴성으로 소란스럽던 수적의 진영이 돌연 얼어붙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견훤은 그 자리에서 훌쩍 뛰어내려 한혈마로 바꿔 타고 허공에 칼을 한 번 저어대니 견훤의 승리를 확인한 방수군이 사기충천하여 함성을 올리고 창칼을 세워 수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견훤은 그대로 수적의 무리를 향해 돌풍처럼 나아갔다.

 

수적들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기던 한혈마가 이제는 아비지옥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가 되어 들이닥치니 이미 대장이 죽고 전의를 잃은 적도들이라 감히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혈마를 타고 적을 유린하는 견훤의 기세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말과 한 몸이나 된 것처럼 이리 치고 저리 나아가며 칼춤을 추어대니 튀는 것은 적들의 피요 날아가는 것은 적의 목이라 마치 혼자 적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보니 항복이고 도망이고 뭐고 없이 그대로 전멸이었다.

 

이백 명에 가까웠던 수적들은 해안에서 배를 지키고 있던 스무 명 정도의 인원 외에는 전부 송장이 되었다.

 

견훤은 적선까지 모두 탈취해서 재물과 식량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서남해 방수군으로 출전해 얻은 첫 승리였다.

 

견훤은 목숨을 잃은 수하들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고 수적들의 송장은 한곳에 모아 불태우게 했다.

 

견훤은 포로로 잡은 수적들을 군영에서 쓰는 노비로 삼고 또한 심문하여 다른 수적들의 자취를 탐지하였는데 그중에는 수적 괴수 곁에서 통변하던 자도 있었다.

 

수적들을 살육할 당시 삼한 말을 써서 용케 살아남은 것이었다.

 

“너는 신라 사람으로 어찌하여 금수 같은 것들과 한패가 되었는가?”

 

신범이 결박된 채 꿇어앉은 통변에게 호되게 물었다.

 

“저는 당나라 등주(중국 산둥성)에 있는 신라방(新羅坊)에서 당나라와 본국을 오가며 무역을 해오다가 바다에서 붙들려 본의 아니게 통변 노릇을 하게 됐습니다.”

 

“그럼 저것들은 어디 놈들이고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인가?”

 

견훤에게 목숨을 잃은 해적의 수괴는 당나라 등주 지역을 지키는 이름난 장수였으나 반역을 모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기어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에는 수하들과 조그만 섬을 하나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그 후 땅이고 바다고 가리지 않고 약탈과 살인, 인신매매를 일삼았다.

 

그들은 특히 방비와 군사력이 허약한 무주공산과도 같은 신라를 먹이로 삼아 마음껏 유린하였는데 날씨가 포근한 봄과 가을을 틈타 더욱 횡행하였다.

 

통변의 말로는 견훤이 얻은 한혈마도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물이었는데 수적이 도중에서 약탈한 것이라 했다.

 

“그럼 네가 속해 있던 놈들 말고 다른 놈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양주(중국 장강 지역)에 있는 수적들도 침탈이 잦은 편인데 날이 선선한 이 시기에 그것들도 분명 움직임이 있을 것입니다.”

 

통변의 대답을 듣고 신범이 시선을 견훤에게 돌렸다.

 

“이쯤 되면 다른 곳의 방수군에도 대비하라 알려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하겠지요.”

 

견훤이 말하자 정탁이 조언했다.

 

“일단 가까운 양무군(전남 강진)에 연통을 보내고 무진주(전남 광주)에 있는 대장군에게 이곳 상황과 승전보도 전해야 하네.”

 

“수적들에게 노획한 것들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애가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 하겠지.”

 

견훤이 능애의 의견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신범이 어두운 낯빛이 되어 말했다.

 

“대장군에게 우리의 승전보와 전리품을 보내는 것이야 옳은 일이지만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백성들의 안위를 지켜야 할 대장군이 지위를 망각하고 후방에서 흥청망청하며 방수군의 군량 보급도 하지 않고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아 자족하라는 인사인데 우리 군사의 목숨과 맞바꾼 재물들을 굳이 보내야만 하겠는가?”

 

견훤은 신범의 의견에는 동감하나 군규(군의 법규)를 망각할 수 없으니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정탁에게 견해를 물었다.

 

정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신 군관의 말이 이치에 닿긴 하나 무능한 대장군이라 하여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보내지 않는다면 분명 군법을 어겼다 하여 책을 잡을 것이니 후환이 따를 것일세.”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적법한 의견이었다.

 

견훤은 아무래도 군법을 벗어날 수 없는지라 노획물과 포로 일부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회의를 파하던 차에 관흔이 사납게 문을 밀쳐내고 들어왔다.

 

“형님! 승냥이 새끼들이 쳐들어와서 다 죽였다 하우!”

 

말에서 떨어지며 갈비뼈를 다쳤다 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관흔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거, 무슨 소리냐?”

 

신범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형님, 아예 싹 다 죽었다니까요! 어서 놈들의 목을 따러 가십시다.”

 

관흔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다들 쓴 고약을 씹은 듯한 인상을 썼다.

 

“형님, 양무군에 수적들이 쳐들어와 난리를 쳤다는 소리 같은데요.”

 

추허조가 관흔의 얼굴을 묘하게 뜬 눈으로 관찰하고 그 앞뒤 없는 말을 해석해냈다.

 

“맞소! 어서 양무군으로 가십시다.”

 

관흔의 확인된 말에 추허조는 자못 자신의 해석 능력을 자랑스러워하듯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견훤의 성이 난 사나운 눈빛을 발견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견훤이 몸을 일으켜 문 앞에 있던 관흔에게 다가서자 관흔은 멀뚱히 서서 눈알만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문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흙바닥에 누워버린 관흔이 강아지 새끼 소리를 내며 낑낑대었다.

 

견훤은 양무군의 사정을 접한 후 대장군에게 보내기로 한 노획물과 포로는 차후에 이행하기로 하고 서둘러 출전 준비를 했다.

 

 

 

 

강이오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삼한(三韓)의 불꽃’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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